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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Young Bae
The scribe who has been made a disciple to the kingdom of heaven.-Matt 13:52

진짜 쉼

교회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오니 12시 30분입니다. 오늘 길에 갑작스런 천둥과 번개를 만나서, 도중에 슈퍼마켓 천막 아래에 숨어야 했지만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저는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신대원 기숙사에서 머물며 공부하고, 금요일 오후부터 주일 밤까지는 거의 교회에서 보냅니다. 그러다 보니 잠을 자는 시간을 포함하여 일주일 168시간 중에서 14시간 정도만을  집에서 보내게 되는군요. 그렇다면 까짓 14시간 차라리 교회나 학교에서 머무는 것이 나았을까요? 상식적으로는 그게 옳은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일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과 버스의 차창 밖의 풍경은 너무도 설레는 마음으로 경쾌하기까지 합니다. 거의 잠만 자고 나오는 집이지만, 집만 생각하면 너무도 그리웁고 간절합니다. 그 이유는 그 집이 바로 제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사회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완전한 쉼을 누릴 것으로 보장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곳에서는 제가 자세를 조금 흐트러져도, 아니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있다고 해도 저를 경홀히 여기거나, 무어라 핀잔을 놓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 곳에서 충분한 쉼으로 다시 학교를 향할 때에도, 사역의 현장을 향해 나아갈 때에도 필요한 힘을 충전합니다. 

이번 하계, 청년 연합집회는 그 모티프를 [쉼]에 두고 있습니다. 시편 91편에 표현되는 진짜 쉼을 수련회의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시편 91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은밀한 곳이며, 우리가 보호 받는 요새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쉼을 얻고 영화로운 상태로 나아간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진짜 쉼을 이번 청년부 수련회에서 경험코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 오는 버스간에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이번 청년부 수련회에서 경험하고자 하는 [쉼]과 제가 향하는 집에서 느껴지는 완전한 쉼과 오버랩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 이번 수련회로 향하는 청년들의 발걸음이 지금 나의 설렘과 같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진짜 평안을 누렸으면 좋겠다.”

우리의 진짜 쉼터는 하나님 품 안입니다. 하나님의 품은 강력한 요새의 성벽 그늘에 기대어 평안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경험한 로뎀나무 아래와 같은 진짜 평안은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진짜 쉼이 되시는 하나님을 이번 하계 연합 수련회에서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청년들 뿐만 아니라 저도 그런 평안과 안식의 기쁨으로 나아 가기를 또한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진짜 피로회복제는 약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품 안에 있습니다. 

이번 하계 수련회를 기대하며 기도로 마음에 품읍시다^^

거울

  요즘 청년부 사역 중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론 어렵디 어려운 사역이 바로 ‘새가족 심방’이다. 우리교회는 기신자이든 초신자이든 새로운 청년들이 교회에 등록하면 일정 기간의 교육을 수료하게 하고, 또 교역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소그룹 모임에 참가할 수 있다. 심방을 진행하는 중에는, 그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는 지극히 피상적인 대화에서 시작하여, 영적인 부분에까지 다양하다. 나는 새가족심방을 마칠 때면 으례 세가지를 당부하곤 한다. 첫번째는 공동체 예배나 GBS에 빠지지 말고 공동체 안에서 열린 마음으로 섬겨달라는 것이며, 두번째는 개인 경건생활으로써 큐티와 기도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  세번째는 주일 아침 거울을 보고 오라는 것이다. 

왠 거울? 

  거울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거울을 본다는 것은 실용적인 목적이 최우선이다. 거울 탄생의 동기와 목표가 그것이니까. 나는 소탈한(?) 남성이기 때문에 사실 거의 거울을 보지 않는다. 화장을 하는 여성들은 자주 거울을 보겠지만. 내가 여기서 거울을 보라고 하는 것은 진짜 거울의 목적에 부합하듯이 얼굴의 부분 부분을 살피듯이 거울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새가족들에게 전달한 것은, 거울을 인식의 창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거울을 대면하여 거울에 반사된 자신을 보고 다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오늘의 예배를 기대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나는 오늘 예배에서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올려 드릴 거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인식하고 내면을 탐험하는 것을 어려워 한다. 충분히 그럴만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2인칭이나 3인칭 타자는 쉽게 인식하고, 그들에게 정언하거나 권유, 또는 명령한다. 같은 이치이다. 거울의 나를 대면하면, 거울 속의 자신을 볼 수 있다. 존재를 인식한다. 스스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권유하고 다짐시킨 하루는 그렇지 않은 날과는 다른 마음 가짐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새가족들에게 예배를 나오기 전 거울 보고 하나님과 자신에게 다짐하고 오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자신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예전보다 어려워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내면 아래로 깊이 들어 가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련하지 않으면 어색하다. 혼자 있어서 스스로를 인식하려는 시간들은 보통 다른 시각적인 미디어들이 차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보통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 순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 어색한 그 시간을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를 놓아버린다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우리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는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종종 거울을 봐야 한다. 거울을 보는 것은 다짐의 시간이자 자기 인식의 시간이다. 나를 인식하고 나를 쳐 복종시켜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더 나아가 우리는 거울로써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해야 한다. 대면할 때 우리는 우리 존재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고 우리의 본질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욥기 42:5에서의 욥의 고백이나, 시편 51편에서 다윗의 고백, 이사야 6:5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깨닫게 된 이사야의 고백, 누가복음 5:8에서 베드로의 고백 등… 성경에서 나타나는 자기인식과 하나님의 인식은 바로 대면함에 있었다. 거울을 보는 것은 결국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식에 미쳤다면,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인식은 전인격적인 인식이며 자기의 본질까지 알게 되는 인식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자기 존재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스승의 날 주일 이벤트]

2012년 5월 스승의 날 주일을 맞아서 청년들에게 축복과 멋진 이벤트를 선물 받았습니다. 울컥 울컥하다가… 흑… 아무튼 김상호 목사님과 함께 이 곳에서 사역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같은 자리에서 축복 받음에 감사하고, 그 무엇보다도 청년들이 자격 없는 저에게 전도사라는 이유로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20/5/2012 분당우리교회 청년2부 

배태 胚胎

저는 사전을 보는 것을 즐겨합니다. 책을 읽다가도 생소한 어휘가 나오거나 의미심장한 어휘가 나타나면, 얼른 아이폰에 설치된 사전을 실행시켜서 정확한 뜻을 기억해두곤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여러 단어 중에는 배태 胚胎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배태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회학 수업 시간에 사회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배울 때였습니다. 이 ‘배태’라는 단어는 ‘아이를 배다’라는 동일한 뜻을 가진 두 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자의 뜻과 같이 ‘아이를 배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하지만, 거기에서 파생된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배태 胚胎 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아이를 배다.], 그리고  [어떤 현상이나 사물이 발생하거나 일어날 원인을 속으로 가짐]입니다. 두번째 의미로서  배태는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사물에게 결과으로 드러나는 어떤 현상의 원인은 이미 그 속에 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새싹이 땅위를 뚫고 나올 때 그 싹의 생명력은 그 씨앗 속에 이미 있었다는 것으로 형상화하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어떤 현상의 원인이 우리 안에, 우리도 모르게 이미 존재했고 내재되어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단어는 저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 왔습니다. 내 안에 이미 있었다…

한편,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서서 아테네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이 말은 사람에게는 신을 향한 갈망이 이미 그 사람들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정을 닮아 창조된 모든 인간은 이미 그 창조자를 향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행위가 배태되어 있던 것이지요. 그것의 왜곡된 표출이 범신론이나 샤머니즘 등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배태된 예배를 하려는 태도를 언급하며 아테네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배태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자연스럽게,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인들을 향하여 선포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하나님을 알만 한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이미 우리 속에 있었다!! 저는 이 것이 너무 기쁘고 또 신기합니다. “아… 원래 우리가 그렇게 지어져서 그랬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과 내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안도와 확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기쁘게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그러니까 예배하는 행위도 너무도 당연한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은 이미 당신 속에 배태되어 있습니다.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시킨다.
CEO 칭기스칸 / 김종래 / 삼성경제연구소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던 나였다.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도 디지털 기기에서 합리적으로 만들어 긴밀하게 인터랙션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고 꽤나 열심이었다. 그러다 정보의 정리 및 공유에 있어서는 오늘 날의 아이폰을 위시한 스마트 기기로 만족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과정으로는 여전히 아쉬웠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아웃라인을 잡고, 마인드맵을 그리는 것이 시간도 단축되고 효율성은 증가했지만 무언가 아쉬웠다. 그것은 점을 찍고, 선을 그리고,  손이 이리 저리 휘갈겨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산뜻한 아이디어의 부재였다.

그래서 며칠간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연필과 노트를 집어 들었다. 오렌지색의  사랑해 마지않는 로디아 No.12. 노트패드의 장점은 노트의 상단에 절취할 수 있는 홈이 있어서 재빨리 노트하고 뜯어 내어 누군가에게 주거나 코르크보드에 꽂아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가지고 다니며 아이디어 스케치를 할 요량으로 몰스킨 소프트커버를 구입했다. 몰스킨은 항상 룰드 노트를 구입했었는데, 특별히 이번에는 플레인 노트를 구입했다. 노트의 밑줄에 구애 받지 않고, 말그대로 휘갈기며 낙서하듯이 생각할 수 있도록. 그리고 길거리 어디에서든 둘러잡고 사용할 수 있도록 소프트커버를 구입했다. 볼펜이 아닌 스테들러 노리스를 선택한 것은,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수정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단문을 작성할 때도 draft로 만들어 놓고 수도 없이 수정하고 단어를 선택한다. 항상 처음의 것은 스스로 보기에도 부족하고 답답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볼펜은 노트의 군데 군데를 검정색 덩어리로 채우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지우개가 달린 노리스는 적격이었다. 

앞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어떻게 사용해 나가는 것이 오늘 날의 삶을 살아가는데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보의 정리 및 활용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지 고민해보려고 한다. 나만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나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반드시 소모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좀 더 내가 되고 좀 더 발전하자.

좋은 것 good은 위대한 것 great의 적이다.

jim collins 1958~ / 경영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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